먼 옜날에는 壇에 祭祠하는 예가 없었으나 옜 선비들로 하여금 의를 일으키게 하니 어찌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겠는가,슬프다 공의 묘가 순창군 남시랑동에 있더니 공의 세대 이미 육백년이 되었다. 이제 창오산이 망망하여 제물을 이룰곳이 없으니 후손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쏟아 임실읍 두곡리 유좌에 담을쌓고 이에 단을 모으니 고려태사 조공과 그 부인 정경부인 영광김씨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라 朱子 가로되 祖先의 靈이 자손의 몸에 있다 하시니 자손의 정성과 공경이 지극한 곳에 신도 또한 감응하시나니 묘와 단을 어찌 달리 의논하랴,
삼가 살피건데 공의 諱는 璵요 그 先世는 玉川씨라 祖의 諱는 璋이요 벼슬은 光綠大夫 檢校大將軍 이니 곧 貫鄕을 얻은 上組시라 考의 諱는 洪珪요 벼슬은 奉翊大夫 版圖判書 이시니 공은 忠定王 신묘년(1351년)에 문과에 오르시니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시고 공민왕 갑오년(1354년)에 金紫光綠 大夫太師에 오르셨으며 이어서 上柱國檢校에 특진 하셨더라.
때에 원나라 몽고가 강성하여 고려를 속국으로 만드니 임금은 어둡고 재상은 포악하여 참소와 사특함이 조정을 어지럽힌지라 공이 경연에 계시어 이공 익재제현과 라공영걸등 여러 어진이들과 더불어 국교를 장악하여 날마다 서적을 강론하니 주자학이 비로소 세상에 일어나서 횡설수설함도 彛倫을 밝히고 華夷를 엄격히 하였을뿐 아니라 불을 공양하고 승이에게 시주하는 풍속과 몸을 색여 문신하며 풀을 엮어 치마를 대용하는 누습등 차차 정사가 가려지고 더러운 풍속은 고쳐지더라 .
명나라 사신 채빈이 피살후로 이인님, 지윤 등이 백관을 위협하여 두루마리를 만들어 북원에 보낼새 선왕의 결책을 지키어 서면치 않은자는 혹 곤장도 맞고 혹 귀양 간 이도 많더라.
포은 정몽주 와 반양 박선생 상충이 글을 올려 순을 버리고 역을 따르며 강을 등지고 약을 따르는 그릇된 계교를 극력 논하니 사의가 깊고 간결하며 밝으시더라, 공이 이로부터 세정에 뜻을 ㄲㄶ고 호연히 고향에 돌아오시여 불우한 여생을 마치셨더라.
슬프다 공이 만약 밝은 세대에 나셨더라면 그 임금을 요순에 이르게하고 백성에게 크나큰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은것이요 그 공훈을 헤아리기 어려웠으리라
삼가 공의 평생을 상고하건데 그 더불어 사귄바와 진퇴 또한 만세의 귀감이 되리로다 공의손자 이판 휘에 연정순 휘에 완 형제의 후손은 그 수가 번성하여 경향각지에 흩어져 살며 능히 그 세덕을 계승하고
산전벽해가 거듭된 장구한 세월속에 병화 또한 많이겪어 가히 증거 할만한 것과 쓸만한 것이 열에 하나도 남지않아 전하여 듣는데서 추리고 또 타고남은 잿더미 속에서 주워모아 공의 세상에 남긴자취를 자료하오니 .......... 이하 생략